
[FDI] 2015년 2월, 산둥(山東)성 차이양쯔(菜陽子)시의 한 농촌의 우물에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됐다. 이 여성은 농민 자녀 출신으로 베이징(北京) 칭화(清華)대학에 진학한 류즈메이(柳志梅 35)였다.
1997년 류즈메이는 가오카오(高考: 전국 대학 입시)에서 산둥성 최고의 성적으로 이듬해 칭화대학 화학 공정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칭화대학 학생이었던 류원위(劉文宇)는 류즈메이에 대해 “매우 순수한 여성이며, 머리가 좋고 얼굴도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동급생이던 리웬판(李艶芳)은 “매우 강하고 총명한 여학생이었다. 파룬궁 수련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뇌 기능 장애를 일으킨 류즈메이는 시신이 발견되기 며칠 전부터 행방불명 상태였다. 가족이 시신을 확인하면서 신원이 밝혀졌으나 공안 당국은 사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 않았다.
중국공산당 정권은 중국 전통 심신수련법인 파룬궁(法輪功; 法輪大法)을 탄압하면서 파룬궁 수련자 류즈메이를 7년간이나 불법 수감하면서 폭행이나 대량의 약물 주사, 고문, 다른 수감자를 동원한 집단 폭행 등을 했다. 구타로 인해 엉덩이에서 발목까지 짙은 보라색으로 변했고,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했으며, 3~5일 간격으로 오는 잦은 하혈로 인해 옷은 빨갛게 물들었다고 한다.
수감 중 이루 말하기 어려운 가혹 행위를 받아 몸이 망가지자 친척이나 지역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그에게서 발생한 사실을 밍후이왕에 제보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밍후이왕에 따르면, 류즈메이는 수감 중에 정신 질환 환자에게 투여하는 3종류의 약물 주사를 맞았다고 한다.
7년이 지났지만 영원한 21세
그녀에게 나이를 묻자 진지하게 ‘21’살 이라고 대답했다. 그 나이에 그녀는 칭화대학의 생활과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당시 그대로 정지한 것 같다.

그녀의 집 벽에 칭화대학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그녀에게 칭화대학은 영광과 학문의 기쁨과 함께 고통과 박해를 가져다준 곳이며, 계속 돌아가고 싶었던 곳이기도 했다.
수감 중 그녀를 찾아온 학교 관계자로부터 “수련을 그만두면 복학을 허가한다”는 말에 설득돼, ‘전향(수련을 포기)’을 하기도 했으나, 전향하고 3년이 지나도 복학은 커녕 출소도 허용되지 않았고, 오히려 수감 중인 다른 수련자를 전향하도록 설득하거나 폭행하도록 강요당했다. 배신, 사기, 폭력, 욕설 등 사람의 사상을 ‘개조’하려는 공산당의 포악한 방법에 넘어간 것이다.
파룬궁 박해로부터 18년
1999년 7월 당시 주석이던 장쩌민은 파룬궁을 공산당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고 상무위원 전원의 반대를 묵살하고 탄압을 지시했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검열 · 통제하고 파룬궁에 대한 모함과 비방을 계속해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파룬궁’ 박해로부터 18년간, 중국 공산당 정권에 의해 수많은 수련자가 연행되고 실종됐으며, 어디에 수감돼 있는지, 그들의 생사여부의 많은 정보를 당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인권 단체 프리덤하우스가 2017년 2월 발표한 중국의 신앙 탄압에 관한 조사보고에 따르면, ‘중국 정신의 싸움’에서 불교와 도교 신자, 위구르 무슬림, 티베트 밀교도,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당국의 박해 비교표에서 파룬궁 박해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로 건너간 파룬궁 수련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박해를 중지시키기 위해 중국의 정치 기관, 사법 기관, 공안 당국과 공산당 지부에 전화하거나 메일을 보내는 등 비인도적인 행위를 즉시 중단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수련자들은 대륙에 해외 언론을 초청해 수련자를 소개하고 취재 활동을 돕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이안 존슨 기자는 현지의 파룬궁 박해를 주제로 기사를 쓰고, 2000년 저널리즘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수련을 통해 닦은 도덕성을 기반으로 심신을 수련하는 동시에 국내외 사람들에게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폭로하고 이를 중지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18년간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